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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딴따라역사

5.18일 광주민주화 항쟁 그 순고하고 눈부신..

by 찌붕이 2017. 5. 18.

오늘은 37년전 광주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날이다. 명칭은 5.18 광주학쟁, 학살, 광주사태, 광주민중봉기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배경은 전두환이 신군부 정국을 주도로 시작되었다. 부정적인 집권을 한 신군부 세력에 정치 관여를 반대하기 위해 학생과 시민 10만명이 서울역앞에서 시위를 버렸고 또한 광주에서도 5월 15일 대학생 3만여명이 도청 앞에 보여 시국선언문을 낭독하는 등 대규모 시가지 가두행진을 버렸는데 그 결과 비상계엄령을 내렸는데 이런 비상계엄령의 민주주의 역행 조치에 항의하여,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 했고 공수부대가 투입 하여 구타 폭행으로 진압되었다. 오후 4시 쯤 제 7공수여단을 시내에 투입하여 시위학생이 아닌 일반 행인들에게도 무차별한 폭력을 가했던 것이다. 이에 반발 하며 맞서지만 계엄군은 곤봉과 대검으로 광주 학생들과 시민을 살상하였다. 


다음날이 19일 부터 시위의 성격이 변화되기 시작하였는데 폭력에 분노한 광주의 일반 시민과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에 합류 하기 시작 되었고 시위에 참가 인원은 3000명정도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언론은 통제되어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 되었는데 분노한 시위대는 광주MBC방송국을 방화해버린다.

최초 발포가 된것은 20일 24시에 가해졌다.21일 시민들도 계엄군의 폭력으로 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경찰서와 파출소의 예비군 무기고를 열어 총들 들고 무장하고 시민군을 결성했다. 이를 저지하여기 위해 광주외곽봉쇄작전이 실시 되었다. 

22일 이후에는 군인들에게 광주는 포위 되어 고립되었고 시민군이 계엄군에게 협상을 하고  광주항쟁 기간 동안 시민들의 도덕성을 보였다. 하지만 5월 27일 새벽에 군인 25000명을 투입하여 광주 시내로 들어와 전라남도 도청에서 일방적으로 1만발을 사격하여 남아있는 항쟁시민군을 살상 하였다. 그 후 도청 내 일부 시민군이 생포 되어 연행 되어 작전을 마무리 되었다.

연행된 시민군은 가진 고문과 비인격적인 모독 등을 당했다고 한다.(물고문, 밥굶기기, 심리적고문 등) 이로 인해 정신적인 후유증에 시달려 정상적 생활을 못하고 정신질환을 앓다 사망하고 엄청난 공포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이 항쟁에 피해는 어마어마 했다. 행방 불명자 200명 부상자 4300여명 의 시민들이 다쳤고 진압 경찰 4명, 군인 22명 도 사망하였다.


이항쟁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독재체제의 입지를 약화 시켰으며 민주주의 행쟁의지를 보였다.

필자는 생각한다. 이러한 순고한 희생이 멋있고 나였으면 그 경우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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