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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딴따라역사

독립운동가 신현구

by 찌붕이 2017. 6. 8.

신현구 선생은 1882년 충남 논산군 부적면 안천리에서 신지균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평범한 농가에서 성장한 그는 17세 무렵까지 고향 서당에서 한문을 익히다가 공주 영명학교를 설립한 미선교사 윌림엄즈(우리암 禹利岩)를 만나면서 기독교에 입문하여 공주 영명학교에서 신학문을 익혔다. 영명학교를 마친 뒤 그는 공주 계룡에서 사립 원명학교를 세워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기독교 전도사업에 힘을 쏟았다. 20세 무렵인 1902,3년 모교인 영명학교에 한문 교사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이규갑 등과 교유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워 나갔다. 이 무렵 교육계와 기독교계 인사가 그러했듯이 그는 계몽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온화한 성품의 그는 1908년 대한학회에 歎愛身不愛國이라는 논문을 기고한 바도 있었다.선교사들과 교류가 많았던 그는 1909년 정동교회의 미선교사 텔러의 한국어 교사로 지내면서 1년 남짓 서울 생활로 보냈으마 1910년 망국의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낙향하고 말았다. 공주에서 생계를 위해 서적상, 미싱회사 사원으로 일하다가 1915년경 서울에 올라와 이화학당 부속&nbsp 여학교인 아현여학교, 공덕리여학등에서 한문 교사를 지냈다. 이때 정규식, 안교일 등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의 방도를 모색하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기독교 계통의 인사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3.1운동을 민족독립의 절호의 기회로 판단한 그는 보다 구체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1919년 4월 대한독립애국단을 결성한 것이다.3.1운동의 열망을 지속적 독립운동으로 이어가지 위한 전국 규모의 조직을 구상한 것이었다. 본부의 초기 단원은 동생인 신현창(29)을 비롯하여 권인채, 김순호, 김영식(23) 등이었다. 신현창은 공주 영명학교를 거쳐 1918년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뒤 의사로 근무하고 있었으며, 권인채는 동향 출신의 후배로 공주 영명학교에서 같이 근무한 일이 있고, 이 무렵 연전문에 재학중이었다. 김순호는 중앙학교 학생이었다.이들은 문봉의(43), 서병철(29), 안황, 안교일(33), 김영철(23), 이시우(30), 김상덕(26) 등을 등지로 포섭하면서 조직 체계를 갖추고 연고 지역을 바탕으로 지단 설치에 힘을 기울여 갔다. 김영철은 경성의학전문 학생, 김상덕은 연희전문 학생이고, 안교일은 이화학당 부속 여학교 교사였다. 신현구와 문봉의를 제외하고는 20대에서 30대 초의 신교육을 받은 청년층이 중심을 이루었다. 부서 구성으로 볼 때 초기의 주요 활동은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비중을 두었던 것으로 여겨진다.서울에 본부를 둔 대한독립애국단은 전라도와 충청도, 강원도 등지로 조직을 확대해 갔다. 전라도의 조직 활동은 5월 초순 재무총장 김순호의 지도로 김영식이 주관했으며, 활발하지는 않았지만 전북 고창지역에 지단을 설치할 수 있었다. 김영식은 강대선에 이어 박인식, 이기하, 유희영 등을 단원으로 포섭하였고, 고창 부호 강대직을 상대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본부의 재정 자금을 충당하였다. 주목할 것은 이들이 자금 모집 과정에서 임시정부 지원을 내세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대한독립애국단이라 하면 임시정부 지원단체로 알려져 있지만 결성 초기부터 임시정부 지원을 목적으로 삼았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대한독립애국단은 자생적 독립운동단체로서 독자적 활동을 모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독립운동 열기가 국내외로 확산되면서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이 구심체로 부상하자 그에 따른 지원 활동을 행동 지침으로 삼아갔던 것 같다. 이 무렵 신현구는 동생 신현창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파견하여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이루어 나갔다. 임시정부는 6월 말 안창호가 내무총장에 취임하면서 7월 초 임시정부 국내조직인 연통제 시행을 공포하고, 국내 기반을 획득하는데 전력을 기울여 갔다. 그런 상황에서 동년 7월 충청도 지단과 8월 강원도단 설치 과정에서 대한독립애국단은 임시정부 지원을 표방하고 나섰다. 안창호가 대한독립애국단 조직을 격려하며 신현구에게 보낸 감사장은 지단 설치에 주요한 활력과 근거로 활용되었다.충청도 지단은 대략 세 갈래로 추진 되었다. 하나는 본부 재무감독인 문봉의를 통한 조직과 다른 하나는 서병철에 의한 서산일대의 조직 그리고 대한독립애국단의 후계조직이라 할 수 있는 혈복단의 조직 등이었다. 서병철에 의해 설치된 서산지단은 평양의 대한독립청년단과도 연결되면서 조직을 확대해 갔다. 평양의 기독교 학교인 숭실학교, 광성학교의 교직원, 학생 및 기독교인이 1919년 9월경 조직한 대한독립청년단은 평양 대한국민회의 청년단체로서 임시정부 지원을 목적한 독립운동단체였다. 그리고 이들은 서울의 기독교 계통 학교나 공주의 영명학교 등과도 연결되어 행동 반경을 넓혀 나갔다. 비밀결사의 규모와 활동의 폭이 크고 넓었던 것은 3.1운동의 확산 과정에서 나타난 이 시기 독립운동의 특징이기도 했다. 전국 규모의 비밀결사를 구상한 것도 그와 같은 배경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재무감독 문봉의는 이시우를 파견하여 청양, 예산 논산 일대에 지단을 설치하는데 힘을 쏟아 11월 경 충청남도단과 청양군단을 세웠다. 그리고 충청남도 단장에 유경재, 청양군단장은 유환방 부자가 맡고 서승렬, 정상길이 단원으로 참가하였다. 이들은 부자 또는 처남 매부 사이로 3.1운동 때 향리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인사들이었다. 청양군단은 본부의 재정자금을 지원하는 정도의 활동에 머물렀다. 논산에 설치한 혈복단은 단장 신현구가 체포될 무렵인 11월에 문봉의, 안교일 등 대한독립애국단 인사와 임시정부 특파원 김태원 등이 연대하여 결성한 조직이다. 김태원은 동년 7월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연통제 실시를 위해 국내에 파견된 특파원이었다. 신현구의 피체 이후 어려운 상황에 놓였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서울을 떠나 논산 일대를 무대로 만든 것이 혈복단이었다. 그런 점에서 혈복단은 대한독립애국단의 후계 조직인 셈이다. 단장 신현구가 체포되었지만 대한독립애국단 조직이 발각되이 않았던 것은 그와 같은 비밀성이 철저하게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대한독립애국단의 지단 가운데 조직과 활동면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활발했던 것은 강원도단이었다. 1920년 초 강원도단이 발각되면서 대한독립애국단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는데, 이 때 언론지상에 철원애국단으로 보도되면서 대한독립애국단은 철원애국단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강원도단은 1919년 8월 김상덕에 의해 추진되었다. 김상덕은 금화 출신으로 연희전문에 진학하기 전 금화에서 사립학교 신창학교를 세웠으며 전도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런 관계로 철원의 교육 및 교회 인사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그가 철원의 교회 인사들을 찾아가 대한독립애국단 설치를 알린 뒤 불과 이틀만에 군단을 설치했다는 사실이 그같은 관계를 말해주고 있다. 철원군단에 참가한 인사들은 대부분 철원남감리교회 교인들로 철원에서 사립학교를 세우거나 교원으로 활동하며 항일의식으로 충만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민족독립을 위한 열망으로 일찍부터 동지적 결합을 이루고 있던 이들은 3.1운동을 경험하면서 독리분동의 조직화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대한독립애국단의 소식을 접하면서 철원군단을 결성했던 것이다. 철원군단은 단장 이봉하, 서무과장 강대려, 재무과장 김완호, 통신과장 박연서, 학무과장 박건병, 외교부원 이용우, 김철회, 오세덕 등으로 구성되었다. 군단 결성 직후 통신과장 박연서가 서울로 올라와 단장 신현구에게 결성 과정을 보고했고, 신현구는 철원군단으로 강원도 조직을 관할케 하여 철원군단을 강원도단으로 승격시켰다. 주목할 것은 철원군단의 결성 장소가 불교사찰인 도피안사였다는 점이다. 기독교 인사들이 불교 사찰에서 모였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은 일이고, 강원도단이 거행한 만세 시위에 불교 승려가 관여되었던 점을 감안할 때 종교 이념을 초월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해 갔음을 보여주고 있다. 3.1운동 때만해도 강원도에서는 서로 다른 종교가 연대하여 만세운동을 벌인 일이 없었다. 그러나 3.1운동을 경과하면서 종교간의 장벽도 허물고 민족 독립을 추구해 간 것이다. 강원도단의 조직 확대는 주로 조동대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는 황해도 금천 출신으로 철원에서 성장한 기독교 전도사였다. 한의학을 전공, 약종상을 하기도 했던 그는 철원 봉명학교와 배영학교를 중심으로 구국교육 활동을 폈다. 당시 배영학교는 군사교육까지 실시하던 민립학교였는데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된 후 그는 서울과 강원도 등지에서 전도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그의 노력으로 강원도에는 강릉군단, 양양군단, 평창군단 등이 설치될 수 있었다. 그리고 평창군단에서는 별동대로 이식계를 위장한 창일계를 조직하여 농민층에 접근해 갔다. 이러한 창일계는 대한독립애국단이 조직 확대 과정에서 대중적 기반에 접근해 갔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임시정부의 성립은 민족의 주권적 의지의 표시였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조직화와 발전을 위해 최선을 길이었다. 그런데 임시정부의 존립과 호라동을 위해서는 국민적 기반이 있어야 했다. 임시정부의 성격상 국토와 국민의 한계를 갖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국내로부터 국민적 지원이 없이는 그의 유지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임시정부의 당면한 문제는 국내로부터 인적 물적 자원을 조달하는 국내 조직의 확보였다. 그리하여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국민적 의지를 한데 모으기 위해 각처 정부의 통합을 주도하는 한편 국내 조직의 확보에 힘을 기울였다. 임시정부는 국내 조직을 확보하기 위해 연통부와 교통국을 설치하는 한편, 국내 독립운동 단체를 결속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연통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내 조직이었다.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가 진두 지휘한 연통제는 임시정부의 핵심적 조직으로서 국민간에 기맥을 상통하고 복국사어의 완성을 기하여 내외 활동의 일치에 목적을 둔 것이었다. 연통제으 주요 활동은 임시정부의 선전,통신연락, 자금 수합 등이었다. 연통제는 1919년 7월 10일 공포된 후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등 북부 지역에서는 활발히 전개되었으나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 중부와 남부 지역에서는 거의 실현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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